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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각

나, 애둘맘 그리고 전업 8개월차..

by 빛이오는공간 2020.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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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나의 꿈은 '선생님'이었다. 부모님의 희망이었는지, 나의 꿈인지 지금은 생각해보면 핵갈리긴 하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언제나 '선생님'이었다. 기질이 범생이 스타일이라 중학교, 고등학교도 무난히 공부를 했었고 꿈에 그리던 '사범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임용고시를 통과하지 못해서 '선생님'은 되지 못하였고, 교육회사에 입사를 했고, 27살에 결혼을 하고, 29살에 아들이 태어났다.

 

  어렸을 때, 어른들을 보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슈퍼맨 같았다. 나도 어서 어른이 되어서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하고 싶은 일도 오래 해야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게 왠 걸? 내가 막상 어른이 되어 보니, 억압에서 벗어나는 대신 막중한 책임과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왜 몰랐을 까? 알려줘도 안 들렸을 거다. 분명.

 

  첫째를 낳고 친정엄마께 아이를 맡기고 백일만에 출근하는 날은 즐거웠다. 마치 곰이 백일동안 마늘만 먹다가 사람이 되어서 동굴 속으로 나오는 느낌이랄까. 사람들과 어울려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출근하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던 것 같다. 하지만 늘 일하시다가 나 때문에 동굴 속으로 들어간 엄마를 바라보는 것이 힘들 줄이야. 그리고 아이의 하루는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데..  

 

  아이가 돌쯤이 되었을 무렵부터는 주양육자가 할머니이다 보니, 나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 할머니가 없으면 울고 나는 그저 놀아주는 동네 이모쯤 되는 듯했다. 나의 일은 내가 해야 직성이 풀리고 은근 완벽주의자 성향의 내가 그걸 참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점점 출근하는 발걸음이 무거워졌고, 엄마의 지친 표정이나 아이의 얼굴이 떠올라서 지하철에서 우는 날이 많아졌다. 다 같이 행복하려고 일을 선택했는 데, 아이는 할머니 품에서 행복해 보이지만,, 엄마인 나를 찾지 않는 아이를 보는 나는 행복하지 않았고 손주를 양육하는 엄마 역시 너무나 지쳐 보여서 내 마음 역시 늘 무너지는 듯했다.

 

  그렇게 1년, 2년이 흐르다가 갑자기 둘째를 임신하게 되었다. 계획하지 않는 상태로 아이를 임신했지만 돌이켜 보면 적당한 시기에 온 선물같은 둘째였다. 둘째를 임신하면서 그동안의 고민은 더 이상 고민에 머물지 않고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일 욕심이 유별난 나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아이를 조금이라도 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공부방'을 하게 되었다. 결국 내 꿈인 '선생님' 호칭을 얻게 되었다.

 

  공부방을 운영한 3년의 시간은 내가 우리 아이들의 학습을 어떻게 이끌어 줄지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이런 저런 유형의 초등학생들을 보면서 초등학생 시절이 얼마나 중요한지, 엄마가 아이의 학습을 어떻게 끌어주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했던 것 같다. 만약 이 시기가 없었더라면 나는 어떤 기준도 없이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학원을 순회하며 아이를 밀어 넣었을 것 같다.

 

  첫째가 6살 말쯤, 공부방을 정리하였다. 공부방은 직장인보다 시간적 여유도 있고 금전적으로도 도움이 되었지만, 바쁜 것은 여전했고 아이를 친정엄마께 맡기는 것도 변함이 없었다. 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 데, 아이의 시간을 함께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선택은 아직까지 후회 없다. 그렇게 8개월차 전업맘이 되었다. 유아기와 초등시절에는 '습관'과 '기초'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도 간혹 유혹되고 흔들릴 때도 있지만 꾸준히 마음을 잡고 아이의 공부 '습관', 그리고 '기초'가 되는 학습에 대해 매일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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